부산근교산

금강공원 일제강점기 잔존 시설 탐방

백천(栢泉) 2025. 5. 20. 06:40

일       자 : 2025.05.19 (음력4/22) 1388차 (2025년 38) 월요일.

날       씨 : 부산 맑음 14.8 / 21.9 도.

코       스 : 미남지하철역~우장춘기념관~독수리상~금강공원~온천장역.

 

 어릴 적 동무들과 골목골목 띠어 다니면 놀던 곳이 재개발로 인해 정겨웠던 마을이
살아졌다.
이틀 전에 금강공원 찾을 때, 금강공원 스토리 안내판을 살펴보다가 온천동에 살면서
모르는 것이 많았군 나 싶었다.  어릴 때 추억도 챙겨보고 또 몰랐던 역사에 현장을 찾
아 보기로 했다.

 산저 교차로. 앞에 보이는 주택지는 옛 원예시험장 터였다.
앞에 보이는 아파트 뒤쪽에는 저수지 역할을 하는 큰 연못이 있었다.
송사리, 붕어, 잉어, 가물치, 장어 등.. 개구리, 두꺼비, 새우.. 민물에서 사는 생명체는 그의 다 있었던 것 같다
필자가 살던 집에서 한 발짝만 넘으면 바로 연못이었다.

외삼촌께서 시험장에 다녀 섰고, 덕분에 싶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또 시험장 사택에 사는 친구도 있어 연못, 계곡에서 물놀이와 송사리 잡고 놀았던 기억이 스쳐 지나네요.

▼ 우장춘 박사 기념관과 우물.
여름에는 냉장고에 물처럼 시원했고, 겨울에는 손 시린 줄도 모을 정도로 따뜻했다.

여기서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용머리상과 독수리상 등 아홉 가지 잔존 찾으러 갑니다.

▼ 주택 골목 쭉 따라 올라갑니다.
처음 마을이 들어설 때 부자 동래라고 했지요.

▼ 삼정 거린빌라 담벼락 골목으로 갑니다.

골목 들어서면 바로 용 못(어릴 때 부르던 지명), 용머리 상이 있었던 곳이다.

▼ 몇십 년 만에 와보니 너무 많이 변해 있습니다.
용머리 상이 있던 곳 있데 묭머리상이 보이지 않는다.

▼ 용 못(어릴 때 부르던 지명).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도리이기조의 농장이었다.

1965년도 국민학교 시절 때 산골짝에 있었던, 연못에 시멘트 공굴로 쳐놓았네요.
다이빙할 정도로 깊었던 곳이었다.
금정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연못을 거쳐, 원에 시험장으로 흘러 지금의 온천초등학교,

온천천으로 흘러 같다.

▼ 용머리 상이 있었던 자리에 보이질 않는다.

계곡수가 용 입으로 통해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렸다.

▼ 용두상

  권능(權能)을 상징하는 용은 미륵불상(19968월 어느 누군가가 몰래 철거하여 지금은

그 자리만 남아 있음)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50m에 위치한 하천이 잇는데 3m의 둑

높게 쌓고 용두(龍頭) 한 쌍이 있다.

옛날 이곳은 도라이가 인공 못과 폭포를 만들어 용의 입에서 폭포가 쏟아져 내리도록 만들

었다. 여름철에는 용의 입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면 무더운 한낮이라도 공포감이 일어

것만 같이 시원하였다고 한다. 1970년까지만 해도 인근 주민들이 여기서 폭포수를 맞으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 독수리상 찾으러 갑니다.

금강공원 가는 숲길에 소쩍새가 노래도 불러주고, 조용하고 좋습니다.

▼ 산길에서 독수상을 찾았습니다.

부산전자공고 뒷산 철망 울타리 옆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도리이기조의 농장이었다.
도리이기조는 농장에 독수리상, 용머리상, 미륵불상 등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독수리 상만 남아 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첫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동무들과 독수리 날개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놀이를 하고 놀았던 기억났다.

그때는 아찔하게 높았는데.

▼ 미륵불상 터

자비심을 상징하는 미륵불은 현재 부산전자공고 뒷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꽃좌대 높이 87, 지른이 150인 그 위에 6m가 되는 미륵불 입상이 인조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일본인의 엄숙한 얼굴 표정에 고깔 두 선을 머리에 덮어 쓴 뒤 허리춤에는 일본인의 전통의상 모양과 비슷한 끈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두 손을 합장하고 서 있는 미륵불은 멀리 동해를 응시하고 있다.

도라이는 자기가 죽으면 미륵불의 안내를 받아 극락세계로 갈 무덤을 미륵불 입상 좌대 밑에 만들었다고 한다. 1996 8월 어느 누군가가 일제의 잔재라 하여 몰래 불상을 철거하여 지금은 그 자리만 남아 있다.

   = 제단의 글귀 =

이곳이 명당 터라고 해서 1930년경 부처님을 조성하였습니다.
(사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일본인이 조성한 부처님이라고 해서 부숴서 여기에 묻어 놓았고,
지금은 그 흔적은 없고 이 사진만 있습니다.
(합장하시는 분은 제 아버님입니다.)

 

▼ 금강공원으로 가는 길 풍경.

▼ 돌 다리.

두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유기견 들개 포획털.

▼ 일본식 불상도 그 당시 잔존이다.

세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금강연못(청룡담).

네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13층 석탑 찾으러 가는 길, 금강연못에서 안내판이 보이는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 수목보호구역 안내판, 세갈로 자란 소나무 방향으로 갑니다.

▼ 잠시 후 좌측 계곡 수로 옆에 우물 터가 보인다.

다섯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우물에서 13층 석탑으로 갈 수 있다.

▼ 또 다른 돌다리.

▼ 황기 2600년 기념비가 보인다.

13층 석탑 먼저 보고 돌아 나오면서 황기 2600년 기념비 보러 갈 갈까 합니다.

▼ 계곡 건너서 갑니다.

▼ 걸쳐 놓은 나무다리 건너갑니다.

▼ 나뭇가지 숲속에 숨어 있는 13층 석탑.

▼ 희미한 돌계단 따라 오름 길.

▼ 13층 석탑, 후락탑(後樂塔) 이라고도 한다.

후락,세인(世人) 들의 즐길보다 늦게 즐기는 일.

여섯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탑의 비문.

금강공원을 개인 정원으로 꾸민 히가시바라 가지로(東동 原원 嘉가 次차 郞량)가 

조선에 온 지 10년이 된 기념으로 세웠다는 내용이다.

▼ 황기 2600년 기념비.

황기 2600년 기념비, 금강원을 동래읍에 기증한 후 업적을 칭찬하는 기념비다.
황기(皇紀)는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의 즉위 년을 원년으로 하는 일본의 기년법으로,

황기 2600년은 1940년을 뜻한다.

일곱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돌다리 건너가면 우물 터 나옵니다.

▼ 돌다리 건너와 우물 터 다시 만났습니다.

▼ 안내판.

▼ 동래금강공원 시비.

▼ 동래금강원 입석. 

여덟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독진대아문이 있었던 자리. 

▼ 동래 수안동 동래시장 부근 동래부동헌으로 옮겼다.

▼ 돌계단. 

아홉 번째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 금강공원 스토리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탐방 둘러보았다.
옛 원예시험장 뒤산에 있었던 용머리상, 미륵볼상 일제의 잔존인데 철거 되었다.

용머리상 밑에 무속행위 방지를 위해 주민들 민원 때문에 철거를 했지 싶다.

▼ 소림사 방향으로 안 가본 길 따라가 봅니다.

▼ 넓은 숲길에 합류했습니다.

▼ 도롱뇽 서식지.

▼ 소림사.

▼ 소림사의 충견 태양이.

  멧돼지3마리와 싸워 등산객·주인 살린 소림사 강아지

부산 금정산의 한 사찰에서 기르는 개가 절에 들이닥친 멧돼지와 맞붙어 주인과 등산객을 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2018년8월9일 오후9시20분쯤 부산 동래구 금강공원 내 소림사 인근에서 홀로 야간산행을 하던 여성이 멧돼지3마리와 마주쳤다.

이 여성은“살려달라”고 크게 소리쳤고 흥분한 멧돼지가 여성에 달려들려는 순간,이 광경을 본 소림사 여신도 김씨가 멧돼지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절에서 기르는 개‘태양이’의 목줄을 풀었다.

김씨의 예상대로 멧돼지는 방향을 돌려 태양이를 쫓기 시작했다.이때부터 태양이는 사람이 있는 절방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김씨는“태양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멧돼지를 유인하려고 했는지 절방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며“근데 멧돼지 한 마리가 나를 따라 절방으로 뛰어오자 태양이도 방향을 바꿔 따라 들어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태양이는 앞서 절방으로 뛰쳐 온 멧돼지와 뒤엉켜 한판 싸움이 벌였다.

생후1년 남짓 된‘코카 스파니엘’종인 태양이는50∼60㎝의 작은 체구에도 몸집이1m가 넘는 멧돼지에 밀리지 않고 버티며 김씨가 다른 방으로 몸을 피할 때까지 싸웠다.

태양이의 분투에 여성 등산객과 김씨는 무사했지만 태양이는 멧돼지에 엉덩이와 다리 부위를 수차례 물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다.김씨는 태양이를 안고 동물병원으로 데려갔으나 200만원이 넘는 입원치료비에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간단한 응급조치만 받고 매일 통원치료하러 다였다고 한다.

소림사에서30년간 보살 생활을 한 김씨는“사람이 해를 당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 태양이 목줄을 풀었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고 내 생명을 구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그 후로 등산객 여성은 한 번도 태양이를 보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방송 이후에 찾아보았는지 ~ ~

▼ 송림정사(松林精舍).

▼ 자하각(紫霞閣). 

자하(紫霞)는 자줏빛(紫) 노을(霞)이란 뜻으로 석가모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주색의 기운을 말한다.
그런 기운과 성스러움을 이어 받은 각(閣, 토착신을 모시는 집)이라 자주각 이라 한다.

▼ 노스님과 태양이가 평화스럽게 보인다.

▼ 폐가가 된 서양식 집.

▼ 산머루 나무.

▼ 부산민속예술관.

▼ 부산해양자연박물관은 휴무일이다.

▼ 박물관 맞은편 도로변에 있는 바위를 쪼갠 소나무.

▼ 둘러보고 갑니다.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공에 맞서 송상현 장군과 함께 동래읍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무덤이다. 정언섭은 1730년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했다. 그가 임지에 당도했을 때 동래읍성은 왜란 종료 후 1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훼손되고 허물어져 있었다. 이에 정언섭은 동래가 나라의 관문이라 하여 읍성 수축을 계획하고 조정에 건의했다.

1731년 정언섭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 터에서 전사자의 유골이 발견되어 동래부 남쪽 삼성대(三星臺) 구릉지(현재의 내성중학교 부근)에 6기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했다.

묘역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담장 밖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건물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언섭이 글을 쓴 이 비석의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 여섯 무덤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 충혼각.

▼ 임진전망 유해지층.

-  머리 숙여 묵념하고 갑니다.

▼ 온천동 가마터 발굴 작업 중이다.

▼ 케이블카.

▼ 거북이 형상 석.

▼ 금강공원, 일제 강점기 잔존 시설 탐방하고 갑니다.

▼ 집에 가서 소주 한잔할까 합니다.

▼ 온천장 지하철역에서 귀가합니다.
지공선사라서 지하철은 공짜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