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 700리 1회

갈맷길 700리 4코스(4-2구간)

백천(栢泉) 2022. 5. 2. 21:03

산행일자 : 2022. 05. 02 (음력 4/2) 1158차 (2022년 29차) 월요일.

날       씨 : 부산 맑음(다대포에서 오후에 약한 빗방울 잠깐 내림) 10.9 / 19.6 도

산행인원 : 홀로

산행코스 : 감천중앙부두(감천항해양파출소,버스정류장)~두송반도~몰운대

교  통 편 : 자갈치역, 충무동교차로정류장 17번 이용 다대포해양 파출소 하차.

 

10:26 감천중앙부두(해양파출소)

12:50 두송반도(군초소)

17:49 다대포 지하철 1번 출구

도상거리 19.18Km.

소요시간 휴식 포함 7시간 25분.

갈맷길 총거리 700리, 278.8Km.

누적거리 137.31Km.

▼ 갈맷길 여행자 수첩 거리 12.5Km.

 맑고, 화창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고 걷기 좋은 날씨에 기분 좋은 갈맷길을 시작했다.
두송반도, 야망대, 몰운대 구석구석 뒤져본 기록용 사진 작업 중 순간의 실수로 삭제가 

되어버렸다. 아쉽지만 큰 충격의 아픔을 다스려야 했다.
갈맷길 완주 후 다시 한번 더 진행해서 기록을 남길까 한다.

 

▼ 녹음이 우거지는 두송반도 길은 시원하고, 완만한 길은 걷기는 좋았지만 조망이 없

어 옛 군부대 초소에 내려가서 남해바다 풍경도 감상하고 여유를 즐겨 봤습니다.

▼ 두송반도 옛 군부대 초소에서 폰으로 찍은 사진. 송도 두도와 영도 태종대 방향.

▼ 남해 바다 멋진 풍경.

▼ 나무섬과 희미하게 보인는 형제섬.

▼ 야망대.

다대포후리소리의 유래

다대포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함으로써 멸치의 먹이인 부유생물이 많았고 멸치 또한 다른 바다의 멸치보다 살쪄서 맛이 좋았다. 이 멸치는 떼를 지어 다녀서 큰 그물을 쓰는 집단어로 가 유리했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데도 마을의 온 사람들이 달려들지 않을 수 없는 협동 작업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 남아 있던 다대포 지역의 멸치잡이는 이후 급격한 도시화 및 산업화에 따른 개발로 멸치잡이 일을 하지 않게 되면서 멸치잡이의 풍습과 어로요(漁撈謠)가 사라지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 주민들이 멸치후리소리를 중심으로 작업 과정을 재현하고 연희화하여 <다대포후리소리>라는 종목으로 1981년 시연을 하였다.

이때에는 옛날 멸치잡이를 하셨던 분들 중 몇 분이(김영호, 김암우, 김영록) 생존하고 계셨고 이분들에게서 소리의 채록과 멸치 잡는 과정을 고스란히 전수받을 수 있었다.

다대포후리소리에 대하여 1984년 부산시에서 조사를 거쳐 1987년 부산직할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다대포에 멸치잡이 어로철(3월~6월, 10월~11월)이 시작되면 선주를 제주로 하여금 마을 당산에 올라 당산제를 지내고, 해 질 무렵이 되면 어로장 격인 마을 사람이 낫개와 다댓개 사이에 있는 야망대(夜望臺)에 올라 관망하다가 멸치 떼가 몰려오는 징조가 보이면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멸치 떼가 몰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징을 쳐 동네 사람들에게 알린 후 바닷가 후리어막으로 내려와 그물을 싣고, 무사와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낸 후 멸치잡이를 시작한다.

후리소리는 후리그물이라는 큰 그물을 넓게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벼리의 두 끝을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소리(노래)이다. 다대포후리소리는 멸치잡이 후리질의 작업 순서에 따라 부르는 어로노동요에 작업의 동작을 곁들여 연희화하였다.

다대포후리소리는 당산 고사로 시작하여, 그물 싣는 소리,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 바다에 그물 놓는 소리, 벼릿줄을 당기며 부르는 그물 당기는 소리, 그물에 걸린 멸치를 모으기 위해 그물을 쪼으며 부르는 그물 터는 소리, 멸치를 저장통에 운반하며 부르는 가래소리, 가래질 마친 후 동네 사람들과 ‘캐지나칭칭나아네’를 부르며 즐기는 풍어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 정운공 순의비

이 비석은 1798년(정조 22)에 공의 8대손 정혁(鄭赫)이 다대 첨사로 왔을 때 임지 내의 명소인 몰운대(沒雲臺 )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비문은 이조판서 민종현 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쓴 것이다.

비면에는 충신 정공운순의비 라는 8자가 적혀 있고, 비의 뒷면에는 한자 18행으로 정운공의 순절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1592년 9월 1일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 군함 500척과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녹도만호 (鹿島萬戶) 정운(鄭運) 장군은 우부장 으로 출전하여 장렬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정운(1543~1592)은 본관이 하동이며, 영암 출신으로 응정의 아들이다.

1570년 무과에 급제한 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경상도로 출전을 주장한 인물이다.

비문에는 정운공이 몰운대 아래에서 일본군을 만났을 때 몰운대의 운(雲) 자가 자기의 이름인 운(運)과 음이 같음을 알

고서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충무공 전서 와 충장공실기 에는 그가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정운공 순의비 구간은 군부대 통제구역이었는데, 철망 문이 열려있었다.

부산시 사하구(구청장 이경훈)는 지난 20일 오전 11시 다대동 몰운대 정운공 순의비에서

주민 등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제425주기 정운장군 향사를 봉행했다.  -부산일보- 펴온 자료.